“파란 말이 도대체 세상에 어딨어?” “애들도 이것보다 잘 그리겠다.” “전시회에 이런 그림을 낸다고? 게다가 돈을 받고 팔겠다는 거야? 미쳤구먼.”
1911년 12월 독일 뮌헨의 한 갤러리. 젊은 화가 몇 명이 모여 전시를 연 이곳은, “이것도 그림이라고 걸어 놓았느냐”고 아우성치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은 비웃고, 화내고, 그림에 침을 뱉어 댔습니다. 식탁 기둥이나 접시처럼 생긴 말과 동물들, 부자연스러운 색상, 여기에 아예 알아볼 수 없는 기괴한 도형들까지. 이들의 그림은 언뜻 봤을 때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해놓은 낙서처럼 보였거든요. 화가들에게 전시 장소를 빌려준 갤러리 주인은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림에 침을 너무 많이 뱉어서 매일 저녁 그걸 닦느라 너무 힘들어.”
하지만 이런 대접은 수십 년이 흘러 180도 바뀝니다. 전시의 주인공인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 등 여러 화가는 인류의 미술 역사에 길이 남은 거장으로 대우받게 됐습니다. 실제 세상의 물건이나 사람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화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사 가지 않았던 이들의 작품들은 경매에서 무려 수백억 원에 낙찰되는 귀한 몸이 됐지요. 그렇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 걸까요?
몇 년째 미술을 담당하는 기자로 일하며 지켜본 결과 내린 결론은 ‘아니다’입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추상미술, 나아가 ‘뭘 표현했는지 알 수 없는 미술 작품’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추상미술 작품을 다룬 기사들의 댓글들만 봐도 그렇습니다. “나도 그리겠다”부터 시작해서 “현대미술은 사기다”, “부자들이 탈세를 할 때 쓰는 편법이다”….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일 때가 많습니다.
물론 이런 반응이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추상미술이 싫을 수 있습니다. 뭘 그렸는지 알아볼 수 없는 작품들이 천문학적인 가격에 사고 팔리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건 어쩌면 상식적인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작품이 다 좋은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사기나 탈세를 위한 편법으로 쓰이는 작품도 있고, 수준에 비해 너무 값이 비싼 작업들도 많겠지요. 가르치는 듯한 태도로 ‘이런 작품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네가 무식하다’고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꼴 보기 싫은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상미술을 비롯한 이 모든 현대미술이 사기라고 단정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 안에는 치열한 논리와 고민이 있고, 깊이 빠져들면 알 수 있는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지난 2년 반 동안 서양 중세와 근대의 명화를 중심으로 연재해온 ‘그때 그 사람들’은 이제부터 현대미술을 함께 다뤄 보려 합니다. 현대미술 작품이 왜, 무슨 생각에서 어떻게 출발했는지를 알게 되면 작품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여전히 작품이 싫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이제 현대미술을 더 세련되게 비판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만일 연재 기사를 통해 독자 여러분이 추상미술을 조금이라도 좋아하게 된다면, 그만한 기쁨은 없을 듯합니다.
그 시작은 추상미술의 시작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예술가 그룹 ‘청기사파’, 그중에서도 캔버스 속에서 푸른 말을 달렸던 독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1880~1916)입니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덕분에 마르크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곧잘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취미. 진지한 성격이었던 그는 언어학자나 성직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는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학교 뮌헨대학의 철학부에 입학해 종교와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당시 독일의 젊은 남성들은 군대를 1년간 다녀와야 했습니다. 한국의 남자 대학생들이 대개 그렇듯 마르크도 대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치고 군대에 들어가, 이곳에서 여러 경험을 쌓으며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는 자신이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1900년, 군 복무를 마친 만 스무 살의 마르크는 부모님을 설득해 뮌헨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뮌헨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예술의 도시.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20세기 독일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토마스 만을 비롯해 온갖 예술가들이 뮌헨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예술가들에게 그림을 배우기 위해 사방에서 예술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아쉬운 건 미술계 내부의 분위기가 고리타분했다는 겁니다.
독일 최고의 화가로 대접받던 렌바흐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그의 별명은 ‘황제의 화가’. ‘철혈 재상’이라 불리는 비스마르크의 초상화를 80점이나 그릴 정도로, 명사들의 초상화를 도맡아 그리는 실력 있는 화가였습니다. 고전적이고 품위 있는 갈색 물감을 사용해 그린 사실적인 초상화가 그의 특기였습니다. 하지만 젊은 화가들은 그를 뒤에서 몰래 ‘방귀 화가’라 불렀습니다. 고동색 물감을 사용해 그린 칙칙한 색감의 그림만 칭찬하고, 색을 자유롭게 쓴 다른 그림들은 ‘격 떨어진다’며 혹평했거든요. 마르크를 비롯해 미술을 배우는 화가들은 생각했습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매일 같이 똑같은 석고상을 스케치하고, 똑같은 색의 그림을 그리는 나날. 마르크는 이런 반복 학습이 지겨웠습니다. 그러던 차에 1903년 프랑스 여행을 하면서 그의 눈이 뜨이게 됩니다. 반 고흐와 고갱, 모네 등 당시의 ‘최신 미술’을 보게 된 겁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고흐와 고갱의 특별한 작품을 보고 제 영혼이 마침내 평화로워졌어요. 고흐의 해바라기에는 칙칙하고 우중충한 색 대신 화려한 색이, 고갱의 그림에는 규칙을 거부하는 파격과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더군요. 이런 게 바로 미술인 것 같아요.” 이를 계기로 마르크는 자신의 예술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뭘 어떻게 그려야 할까. 인상파처럼 그려 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뭔가 아니다 싶었습니다. ‘인상파 그림은 물론 멋지지만, 뭐랄까…. 시시각각 변하는 연못이나 건물 색깔이 그렇게까지 평생을 바쳐 그릴 만한 주제인지는 잘 모르겠어. 너무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의미를 두는 거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걸 그릴 수 있어야 진정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눈에 보이게 그려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던 1905년 겨울, 고민하던 마르크의 작업실에 다친 참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 왔습니다. 마르크는 평소 동물을 좋아했습니다. 그에게 동물들은 자연과 가장 가까운, 순수한 영혼을 가진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마르크는 참새를 정성껏 보살펴 줬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참새는 죽고 말았습니다. 마르크는 그 모습을 무심코 그렸습니다. 다 그려놓고 보니 꽤 좋은 느낌이 됐습니다. 이어 마르크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그려봤습니다. 그림 속 뛰어오는 강아지의 모습에서 반가운 마음과 기뻐하는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눈에 보일 리 없는 동물의 감정이 그림에 보이는 형태로 담긴 겁니다.
마르크는 결심했습니다. ‘동물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려 보자.’ 그의 추상미술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무조건 사실적으로 잘 그리는 게 훌륭한 예술이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상식이 깨지기 시작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사진기의 발명. 아무리 잘 그려 봤자 사진기를 따라갈 수는 없으니, 대신 화가들은 사진이 담을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과학의 발전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X선(엑스레이), 원자 이론 등의 발견을 통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들이 많다’는 인식이 퍼진 겁니다. 추상성이 강한 동양 미술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도 추상미술의 발전에 한몫했습니다.
1900년대는 서양 화가들 사이에서 이런 생각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마르크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똑같이 그리기보다는 내 그림을 볼 때 사람들이 다른 세상으로 빠져들게 하고 싶어.’ 이를 위해 마르크는 색을 마음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색에 감정과 정신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파란색은 거칠고 영적이고, 노란색은 부드럽고 즐거운 색이야….”
하지만 이런 추상미술을 이해하는 건 당시 사람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섬세한 것들을 즐기려면 사전 지식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법. 최고급 식당에서 나오는 섬세하고 복잡한 풍미의 음식이라도 아무 정보 없이 길 가는 사람 입에 턱 넣어준다면 ‘맛있네’ 정도로 끝날 수 있고, 수천만 원짜리 고급 와인도 처음 와인을 마시는 사람에게는 퀴퀴하게만 느껴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림은 실감 나게 그려야 한다’는 게 평생의 상식이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추상 미술에 거부감이 느껴지는 게 당연했을 겁니다.
그러던 중 마르크는 칸딘스키와 만나게 됩니다. 1910년의 마지막 날, 12월 31일이었습니다. 칸딘스키는 러시아의 법학 교수로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화가가 되기로 한 괴짜. 그는 천부적인 예술적 감각의 소유자였습니다. 교수 자리를 던지고 예술가가 된 계기도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보다가 음악이 마치 선(線)과 색(色)으로 ‘눈에 보이는’ 경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추상적인 음악을 눈에 보이는 미술 작품으로 옮기는 게 칸딘스키의 목표였습니다. 물론 칸딘스키의 그림 역시 마르크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엄청난 비난과 조롱에 시달렸습니다. 두 사람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 마주쳤습니다.
칸딘스키는 회상했습니다. “단 한 번의 대화로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마르크에게도 이 만남은 축복과도 같았습니다. 법학 교수 출신답게 이론을 세우고 정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칸딘스키는 추상미술이 뭐고 어떤 추상미술이 잘 그린 것인지를 이론으로 정리했습니다. 클래식 음악에서 화성학이나 대위법 같은 여러 원리가 있듯이, 추상미술에도 리듬과 균형, 색채와 화면 구성 등 여러 객관적인 원리와 평가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겁니다. 덕분에 추상미술은 ‘아무나 그리는 낙서’ ‘젊은 작가들의 치기어린 파격’이 아니라, 법칙을 갖춘 하나의 예술 체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칸딘스키가 지금도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평가 받는 이유입니다.
1911년 두 사람은 뜻이 맞는 작가들을 모아 ‘청기사파’를 결성했습니다. 중심은 역시 마르크와 칸딘스키였습니다. 푸른 기사들의 모임이라는 청기사파라는 이름도, 푸른색을 좋아했던 두 사람이 마르크의 그림에 등장하는 말 이미지를 보고 정한 것이었습니다.
점점 마르크의 캔버스 속 동물은, 점차 동물의 몸을 벗어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크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면에서 울려오는 본능에 따라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어. 정신은 어느 경우에도 꿋꿋이 살아남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한 걸음씩 앞을 향해 나아가는 거야.”
그리고 1914년 봄, 마르크와 아내는 오스트리아 북부에 작은 집을 샀습니다. 마르크가 꿈꿨던, 자연 속에서 동물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평화로운 삶을 마침내 살 수 있게 된 겁니다. 마르크의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작품을 사주기 시작한 덕분이었습니다.
마르크는 이곳에서 더욱더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공기 속으로 부서지는 햇살처럼, 모양은 없지만 여러 빛깔을 뽐내는 환상적인 그림들. “길을 걷다가 숲 속 공기가 마치 투명하고 두꺼운 초록 빛 유리처럼 느껴지더군. 아련한 마음이 끓어올라서 나도 못 보던 그림을 그렸어. 우리의 영혼은 색채를 영원한 끝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
하지만 1914년 6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이런 작업은 중단됩니다. 마르크가 전쟁에 소집됐기 때문이었습니다. 칸딘스키가 찾아와 인사를 건넸습니다. “잘 다녀와.” 마르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잘 있어.” “재수 없게 그게 무슨 소린가.” “어쩌면 우리가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드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칸딘스키는 독일의 적인 러시아 국적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하게 됩니다.
마르크는 최전선에 투입됐습니다. 수많은 젊음이 죽어갔습니다. 청기사파에 함께 속했던 동료 화가들도 전쟁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쏟아지는 포탄과 날아다니는 피와 살점 속에서 마르크는 생각했습니다. 이 전쟁은 인류가 성숙하기 위해 참아야 하는 성장통 같은 것이라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밝고 따뜻한 그림을 그려서 사람들을 치유해야겠다고. 그래서 그는 총성이 멎을 때면 노트에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색 명령을 받은 마르크가 말을 타고 나섰습니다.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이 터졌습니다. 푸른 말을 탄 기사 마르크는 그렇게 대지와 작별했습니다. 그의 나이 고작 서른여섯 살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구상화에서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그 추상을 더욱 발전시키던 선구자 마르크. 마치 클래식 음악이 새소리를 흉내 내지 않고도 우리 마음을 울리듯, 그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그리지 않고도 사람들의 영혼을 움직이려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마르크의 삶은 그가 꿈꿨던 이상을 실현할 만큼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뜻을 나눠 가진 절친한 친구 칸딘스키가 있었습니다. 추상미술이 세계 미술의 주류로 떠오르는 이 혁명은, 다른 푸른 기사인 칸딘스키에 의해 현실이 됩니다.
다음 주 칸딘스키 편으로 이어집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주 기사는 Marc(Susanna Partsch), Franz Marc(Mark Rosenthal), 칸딘스키와 청기사파(지빌레 엥겔스, 코르넬리아 트리슈베르거 지음, 홍진경 옮김) 바실리 칸딘스키(하요 뒤히팅 지음, 김보라 옮김) 청기사 20세기 예술혁명의 선언(바실리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 등 지음, 배정희 옮김), 프란츠 마르크(토마스 다비트 지음, 노성두 옮김), Expressionists- Kandinsky, Munter and the Blue Rider(테이트 펴냄)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 덕분에 새로 펴낸 책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이 주간 예술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북토크는 이번주 일요일 부산으로 이어집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