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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 피해자 15만명… ‘르완다 내전’ 지옥을 겪은 여성들 [별 볼일 있는 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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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 오브 피스'(2021)
아란나 브라운 감독·각본
97분. 15세 관람가.



1994년 4월 7일. 아프리카 중부의 내륙 국가 르완다에서 집단학살(제노사이드)이 발생했다. 인구의 85%를 차지했던 후투족이 소수의 투치족을 비극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통령이 탄 비행기의 추락 사고가 투치족 소행이라는 주장을 입에 올리면서다. 석달간 이어진 살육으로 국민의 10%인 100만명이 사망했고, 여성 15만~20만명이 성범죄에 노출됐다.

르완다 내전으로 불리는 충격적 사건은 여러 영화에서 등장한다. 돈 치들과 호아킨 피닉스가 출연한 ‘호텔 르완다’(2006)와 라울 펙 감독의 ‘4월의 어느날’(2004)이 대표적이다. 내전을 둘러싼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다. 하지만 대부분 남성 주인공들이 가족과 이웃을 지키는 이야기를 다루는 데 그쳤다.

여성들의 서사가 스크린에 옮겨진 것은 참극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나서였다. 지난 2021년 개봉한 영화 ‘트리 오브 피스’는 난리를 피해 창고에 숨어든 네 명의 여성이 81일간 살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아란나 브라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르완다 출신 배우 엘리아네 우무하예르 등이 출연했다. 지난해부터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영화는 후투족 임산부 아닉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여기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는데…. 우리는 최후를 미룰 뿐이다.” 후투족이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아닉은 온건파 후투족으로 강경파의 숙청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투치족 수녀 자넷과 성폭력 피해 여성 무테시, 미국에서 온 자원봉사자 페이턴과 함께 머물게 된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지하 창고 안에서다.

먹을거리는 없는데 밖을 나갈 수도 없는 상황. 지하 창고를 벗어나면 살육과 강간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극한에 내몰린 여성들은 서로 치고받는다. 상대를 이해하기엔 갈등의 골이 너무 깊었다. 후투족한테 어머니를 잃은 무테시는 아닉 배 속의 아이도 나중에 다른 후투족 남성처럼 자신들을 죽일 것이라 악담을 퍼붓는다. 유엔군이 백인 페이턴만 구조하러 오자 주변에선 그녀를 배신자라고 매도한다. 과연 이들은 화해하고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화의 무대는 3.3㎡(1평) 남짓의 비좁은 지하 창고가 주를 이룬다. 실제 촬영 기간도 30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평범한 저예산 영화는 아니다. 좁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감정 연기를 밀도 있게 배치했다. 감독은 실제로 한 달 동안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수척해지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미국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에서 독립영화상과 스탠드업상을 석권하는 등 평단의 호평도 이어졌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화해다. 영화 제목을 한국어로 옮기면 ‘평화의 나무’다. 유전적으로 키가 큰 투치족을 제거할 때 후투족이 내세운 구호가 “큰 나무를 베어라”였다. 영화는 비극을 상징하는 단어 ‘나무’를 평화의 매개로 재해석했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듯 각자 다른 여성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공존의 메시지를 전한다.



학살로 촉발된 내전은 결국 투치족의 승리로 끝났다. 생존자들은 복수보다는 치유와 용서의 정치운동을 이끌었다. 2001년부터 200만명에 육박하는 후투족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치법정 ‘가차차’에서 화해했다.

영화는 여기에 관여한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한다. 현재 르완다의 하원 의원 중 여성의 비율은 61.3%로, 국제의원연맹 통계에 나타나는 188개국 중 1위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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