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여간 미국의 공격적인 긴축에 보폭을 맞춰온 전 세계 중앙은행이 '각자도생'에 나서고 있다. 일제히 인플레이션에 맞서 금리를 올렸지만, 금리 인상으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각자 다르게 나타나고 있어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중앙은행(SARB)은 30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린 연 7.75%로 결정했다. 당초 0.25%포인트를 올릴 것으로 예상한 시장의 기대를 뛰어넘는 빅스텝(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 인상)을 단행한 것이다. 레세트야 칸야고 SARB 총재는 "연료, 전기, 식품 가격 상승이 남아공의 인플레이션을 주도하고 있다"며 물가 상승이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SARB는 지난 2021년 11월 연 3.5%에서 지금까지 9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인상해 왔다.
호주는 지난 7일 연 3.35%에서 연 3.6%로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호주 중앙은행(RBA)은 지난해 5월 기준금리를 연 0.1%에서 0.35%로 올린 뒤 10회 연속 금리 인상을 이어갔다. 필립 로우 RBA 총재는 "경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물가상승률을 목표치인 2∼3% 수준으로 되돌리려 노력하고 있지만, 이를 달성하는 길은 여전히 좁다"고 언급했다.
다만 긴축의 속도 조절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는 "지표를 볼 때 인플레이션은 정점에 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며 "세계 경제와 호주의 수요 약화를 고려하면 상품 가격 상승세는 앞으로 몇 달 동안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면 베트남은 지난 14일 정책금리를 1%포인트 내린 연 3.5%(재할인율)로 결정했다. 전 세계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피벗'(통화정책 전환)에 나선 것이다. 베트남 중앙은행(SBV)의 금리 인하는 지난 2020년 10월 이후 2년 5개월 만이다. SVB는 올해 정부의 인플레이션이 목표치인 4.5% 수준으로 통제되고 있고, 주요 국가와 비교해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는 점을 피벗의 배경으로 들었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23일 주요국 가운데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동결한 이후 일부 국가 중앙은행의 동결이 이어지고 있다. 캐나다가 지난 9일 연 4.5%의 기준금리를 동결했고, 말레이시아 역시 같은 날 연 2.75%로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인도네시아(연 5.75%), 브라질(연 13.75%) 등도 동결 행렬에 참여했다.
지난해만 해도 전 세계 중앙은행은 일제히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긴축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지면 투자 유출 등 경제에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축 수위가 높아지면서 각국의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특히 한국과 같은 신흥국의 경제 둔화가 가시화됐다. 올해 들어 물가와 경제 성장의 둔화가 보이는 신흥국들은 발 빠르게 긴축 속도 조절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 세계 중앙은행이 일단 '각자도생'에 나섰지만, 향후 Fed의 통화 정책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등의 영향으로 Fed의 피벗이 빨라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Fed 인사들은 여전히 긴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앞서 수잔 콜린스 보스턴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는 전날 전미경제협회(NABE) 연설에서 "최근 은행 혼란의 여파가 지속되고 있지만 인플레이션 압력이 아직도 광범위하다"며 "추가로 0.25%포인트의 금리인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토마스 바킨 리치먼드 연은 총재도 리치먼드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 우리는 금리를 추가로 인상함으로써 대응할 수 있다"고 했다.
인플레이션이 지속되고 있는 유럽 역시 물가에 방점을 두고 있다. 전날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독일의 3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같은 달보다 7.4% 올랐다. 전달(8.7%)과 비교하면 상승세가 둔화했지만, 시장 예상(7.5%)보다는 낮은 수치다.
소비자물가는 하락했지만, 농산물·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는 여전히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 연방통계청은 근원물가 수치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시장에서는 독일의 3월 근원물가 상승률을 5.9%로 추정했다. 이는 유럽중앙은행(ECB)의 목표치인 2%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스페인 역시 3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3.1%로, 전달(6%) 대비 크게 하락했지만, 근원물가는 7.5%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는 ECB가 기준금리를 2~3차례 더 올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재 유럽의 기준금리는 연 3.5%로, 지난해 7월 이후 6회 연속 금리가 인상됐다. 카스텐 브제스키 ING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금융위기가 충분히 억제된다면 ECB는 두 차례 이상 금리인상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